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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5.07.06 헬멧을 장만하다.
  2. 2005.07.06 流의 새로운 전략 - 사적(私的) 언어의 극단화
  3. 2005.07.03 초현실주의

헬멧을 장만하다.

~06년 2005.07.06 23:23 |
流가 자전거를 타기 시작한 건 작년 4월, 일본 아오모리에서 살게 되면서부터. 특히 작년 여름에는 아버지가 운전하는 자전거를 타고, 주말마다 바다(무쓰만)을 보러 가곤 했었다.

자전거를 이용한 이동경력이 1년이 넘었건만, 아직까지 流에게는 안전용 헬멧이 없었다. "속도내지 않으니 문제될 것 없다."는 아빠의 [안이한 안전의식 + 운전능력에 대한 만용]의 산물이었다...

허나, 하나의 주체로서 떳떳하게 자기주장을 할 수 있게 된 流가 드디어 자신의 몸을 위험으로부터 보호코자, 합리적이고 타당하기 그지 없는 요구를 했다.

"나도 헬멧 사줘!"

그렇다... 그냥 "헬멧 사줘"가 아니라, "나도 헬멧 사줘" 이다. 드디어 시작되고 말았다. 이제부터 이 "도"와 밑도 끝도 없이 대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앞날이 캄캄하지만, 그의 "도"가 붙는 첫번째 요구는 이치에 맞는 것이었기에, 流의 부모는 곧바로 그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색깔은 물론 流가 골랐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안전운전 합시다!
Posted by anio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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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적 언어의 극단화

流라는 아들이 있다. 8일 후면 만 3세가 되는 아이이다. 이 녀석이 한달쯤 전부터 이상한 언행을 하기 시작했다.

그림책에는 자연스레 이런 저런 그림들이나 캐릭터들이 나오기 마련인데, 그림책을 읽어주는 사람으로서는 (보통 같은 그림책을 읽고, 또 읽기 마련이므로) 지난 번에 읽었던 내용을 기억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림책을 읽다가, "이건 뭐야?" 혹은 "어? 이게 뭐지?"라는 식으로 넌지시 물어본다. 질문을 받은 流는, 아는 것에 대해서는 자랑스레 답하고,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이게 뭔데?"라고 되물어보거나 "모올라~."라고 답하며, 정답을 가르쳐 주기를 요구했었다.

그런데 약 한달 전부터, 예전과는 다른 식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 "어? 이게 뭐지?"라고 물으면, 우쭐대며 "으응~, 이건 [오짜까빠꼬또]야."라는 식으로 답을 하는 것이다. 뭐, 뭐...라...고...

이런 반응을 하기 시작한지 한달이 되어간다. 처음에는 어이가 없었지만, 왜 아이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묻는 것이 지닌 폭력성>이었다. 카네티의 말로 기억하고 있는데, 질문을 던지는 행위 자체에 이미 권력의 폭력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부모와 아이의 관계는, 물론 불평등한 관계이다. 부모는 아이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권력자이며, 부모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아이는 이 권력구도 속에서 절대적 약자이다. 대체로 아이는 부모를 통해 자기가 앞으로 살게 될 세계를 이해해 가며, 세계에 대한 신뢰를 형성해 간다. 이 '신뢰의 형성'을 가로막았던 체험이 차후에 [트라우마]라는 형태로 그 아이의 인생에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이 권력구도가 근대에 들어와 질적으로 변모했으며, 극단적인 형태로 강화되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프로이트라는 학자가 등장한 것이 이러한 '서구적이고 근대적이며 부르조아적인 가족형태'가 제도화된 시기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조건지워져 있는 이 권력구도 속에서, 강요된 권력자로서의 역할을 적절히 수행하지 못했을 때, 부모는 뜻하지 않게 아이에게 부정적인 역할을 끼칠 가능성이 높아진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대부분의 인류가 겪게 되는 경험이면서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올바른 권력자가 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

부모와 아이의 관계는 이미 불평등한 권력구도라는 조건 속에서 형성될 수 밖에 없기에, 이 권력구도를 파괴하는 것은 아이가 이 세상에 대한 안정적인 像을 갖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과 진배없다. 아이의 세계에 대한 신뢰는 부모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해서, 또한 이를 매개로 해서 형성되는 것이며, 부모의 일관되고 안정적인 개입(권력의 행사)없이는 아이가 세계에 대해 신뢰감을 갖을 수 없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다. (여기에서 '불평등'하다라는 것은, [세상을 인지하기 위한 정보의 제공]이나 [생존을 위한 물질적 요소의 제공] 측면에서 압도적으로 부모 측이 우세하다는 뜻이다.)

푸코는 권력의 부정적인 측면만 볼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측면, 생산의 측면도 잊어서는 안된다고 이야기한 바 있는데, 부모가 아이와의 관계 속에서 집행해야 하는 권력이야 말로 이러한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권력이다. 이 권력을 비폭력적이며, 동시에 긍정적으로 행사해 나가는 것이 부모로서의 올바른 역할을 수행해 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음... 점점 이야기가 본류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느낌이...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자.

3살도 안된 流에게 부모는 별 생각 없이 "이건 뭘까?"라고 묻지만, 流는 부모의 이 별 생각 없이 내뱉은 질문에 올바르게 답해야 한다는 '부담'을 느낄지도 모를 일이다. 권력관계에서 우위에 있는 사람은 권력관계에서 열세에 있는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관심을 갖으려 해도 결국은 알 수 없다. 이는 권력구도 자체가 지니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로, 인간의 의지로는 결코 완전한 해결이 불가능한 문제이다.(가야트리 스피박의 [사바르탄]이란 개념은, 몇겹의 권력구도 속에서 가장 최하위에 위치한 사람들(여성들)은 자신을 표현할 수도, 그리고 설혹 표현하더라도 그것이 제대로 이해될 수도 없다는 - 권력구도가 지닐 수 밖에 없는 필연적인 문제에 대한 처절한 인식에서 나온 개념이 아닐까 - 라고 개인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流는 먼저, 부모의 질문에는 의례 그에 걸맞는 '답'이 있다고,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추어 판단을 할 것이다. 부모의 질문 저편에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 '답'은 모르지만, 답을 말하고 싶다라는 욕망이 아마도, 말하자면 "아짜꼬쪼꾸쭈" 같은 임시방편의 답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 "몰라"라고 말해서 질문에 대한 답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질문이 내포하고 있는 '답'에, 자기나름의 형태를 부여하려는 전략이 사회화된 언어가 아닌, 자신의 자의성에 기반한 [말 비스무레한 것]을 만들어 낸 것이리라. 그것은 타인들에게 '고정된 의미'로 인식되지 않기에 언어가 아니지만, 또한 동시에 타인들에게 특정한 반응을 얻어내고, "몰라"가 아닌 다른 반응을 보이고 싶다는 자신의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기에 <언어적 행동>에 가까운 것이기도 하다.

이 뜻하지도 않은 반응이 재미있어서, 웃었다. 그랬더니, 流는 이 새로운 (말도 안되는)말 만들기 자체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물이 올랐다 싶으면, 원래 알고 있는 것까지도 이를테면 "오까따따뿌짜꼬"라고 부른다. 더 재미있는 것은, 한번 "우끼빠"라고 명명한 물건을, 다시 가리키며 이게 뭐냐며 물으면 "우끼빠"라고 대답하는 게 아니라, 또 다른 명명(예를 들면 "우끼뿌또까")을 한다는 것이다. 流에게 이는 일종의 즉흥적인 명칭부여놀이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공공성을 전제로 하는 '언어'의 형태를 일탈한, 이러한 의미불명의, 그리고 일회성의 호칭부여를 '사적 언어의 극단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인간이 언어를 구사하는 존재가 되는 과정을, [언어 게임]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언어 게임]의 한 플레이어가 되기 위해 [게임원리를 일방적으로 배우는, 교육받는 시기]에, 아이는 이러한 형태로나마 [일방적인 게임 규칙의 주입]에 반항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게임 규칙에 반하는, 즉흥적인 명칭부여라는 유희를 통해서... 이러한 <사적 언어의 극단화>는 아직 [언어게임]에서 약자의 위치에 있을 수 밖에 없는 어린 아이들이 [언어 게임] 외부에 자신만의 질서를 구축하려고 하는, 자아 정체성 형성과정의 일부로서 의미를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2. 몰라

위와 같은 변화가 한달 전부터 생겨났다는 것에 대해, 다른 관점에서 설명이 가능해 보인다. 그것은 "몰라"라는 말의 다의성에 기인한다. 流는, 한달 전까지 모르는 것에 대해 "몰라"라고 답하는 것에 대해서 별 거부감이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약 한달 전부터 流 내부에서 '몰라'라고 답하는 것에 대한 감정의 변화가 나타난 것 같다. 이는 '몰라'라는 단어가 지닌 다른 뜻과 연관이 있으리라.

당연하게도, '몰라'라는 말에는, 상대방의 질문이 요구하는 특정한 정보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라는 뜻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는 당신이 나에게 보여주는 관심이나, 나에게 묻는 질문 자체가 싫다]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즉 "나 삐졌어."를 "몰라"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하는 것이다.

우연히도 流는 약 한달 전부터 "몰라"라는 말을 후자의 말로 자주 사용하기 시작했다. 삐진 목소리로 "몰라!"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부모로서는 상당히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말 안듣는 녀석을 어떻게 해야 하나, 에서부터 아... 그래도 참아야지...까지 오만가지 생각들이 머리 속을 스쳐지나가기 마련이다. 물론, 이러한 부모의 고민은 비언어적인 형태로 아이에게 인지되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아이도 알게 된다. 즉 이때부터, "몰라"는 단순한 인식에 있어서 무지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부모와의 심리적 감정적 긴장상태나 대결상태를 촉발하는 '기폭제' 역할을 하는 단어가 된다. 이러한 '몰라'라는 단어가 지닌 뜻의 다중화도, '몰라'라는 말을 예전보다는 덜 쓰게 된 이유가 아닐까 - 하는 괜한 추측을 해 본다.

Posted by aniooo
TAG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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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현실주의

~06년 2005.07.03 00:01 |
流, 그는 한때 시(poem)을 읊었다.
그가 지구에 존재하게 된 이후로 처음 읊은 시를 작년 가을에 이곳에 소개한 바가 있는데, 그 시를 이곳에 다시 옮겨 본다.

나는 지저분한 메추라기.
나는 바람이야.
나는 하늘을 훨훨 나는 나뭇잎이에요.
적당한 서정성과 우수, 그리고 어렴풋이 느껴지는 방랑벽... 이는 시인의 감성임을 직감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지저분한 매추라기'라는 표현은 '존재의 불완전성'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을 예감하는, 범상치 않은 메타포였다.

流는 그 이후로도 쉼없이 창작에 힘을 기울여 왔건만, 그 동안, 그의 아비는 도대체 뭘 하고 있었는지... 그의 창작은 허공을 향한, 메아리없는 고독한 외침이었다.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망각하고 있던 아비가 오늘은 조금 정신을 차려, 공백으로 일관했던 그 동안, 시인으로서의 安流가 어떠한 수준에 이르렀는지 여기에 적으려 한다. 한마디로 말해, 현재의 단계는 초현실주의이다. 방금 컴퓨터 옆으로 놀러 온 流에게 예전에 자신이 쓴 시를 들려줬더니, 순식간에 새로운 시를 읊기 시작했다.

나는 우쭈쭈쭈꾸뚜뚜 예요.
역시... 주위의 기대에 반하지 않고 초현실주의로 보답했다. 기존의 언어적 관습을 파괴하기 위한 그의 피나는 관념적 노력이 낳은 데카당스적 창조어 "우쭈쭈쭈꾸뚜뚜"에...

정말 할 말을 잃는다
Posted by anio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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